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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 김도리 신부의 손골 성지

 

1864. 5. 21. 삐에르 도리(Pierre Dorie) 집안에 큰 경사가 일어났다.

8남매의 자녀 중 여섯째인 삐에르 앙리 도리(Pierre-Henri Dorie)가 사제 서품을 받은 것이다.

프랑스 방데(Vendee) 지방의 생 틸래르 드 딸몽(Saint-Hilaire de Talmont)이라는

작은 바닷가 어촌에서 염전과 농사를 하여 겨우겨우 끼니를 잇는

가난한 소작인의 집에서 신부를 배출하다니!

 

믿음 깊은 부모는 1839923일 새 아들 도리가 태어나자마자

세례를 받게 했다.

이 예식에 참석한 아이의 부모 형제 친척 중 누구도 글씨를 쓸 줄 몰라서

세례증명서의 증인 란에 아무도 사인을 하지 못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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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도리 신부 생가 마을>

 

지주인 드 베세 백작의 배려로 도리 소년은 13세에 소신학교에 입학,

8년을 다녔다.

15세 때 도리는 잡지 유년을 통해 극동의 나라들에 대해 알게 되었으며,

그 먼 나라에 가서 선교하는 것을 생애의 목표로 삼았다.

21세 때인 1860101일에는 집에서 38킬로미터 떨어진

뤼송 교구 소속 대신학교 입학했으나, 2년 뒤 도리 청년은

극동으로 가기 위해 파리 외방전교회 신학교로 전학을 신청했다.

 

후견인인 드 베세 백작과, 고향의 본당 신부는 이를 극력 반대했다.

약한 몸으로 그 오지에서 배겨나기 힘들다는 걱정에서였다.

그들 생각에, 아지 못할 극동의 나라들은,

아프리카의 오지만큼 사람 살기가 어려운 곳으로 여겨졌을 것이다.

고난이 클수록 선교의 필요가 절실하다는 논리로 도리는 그들을 설득시켰다.

 

그러나 부모의 반대는 쉽사리 꺾이지 않았다.

교구에 남아 신부가 되라. 외방전교회에는 갈 생각을 마라'하고

어머니는 애원했다.

어머니, 외방전교회를 마음먹은 지 8년이나 돼요. 천주님께서 제 마음에 말씀하셨으니

   저는 순종해야 합니다. 그러나 한사코 막으신다면, 어머니 곁에 남아 있겠습니다.

   전교도 신부도 다 그만 두겠습니다. 작업복하고 곡괭이를 주세요.

   형제들과 함께 밭일을 하겠습니다.”

눈물로 밤을 새운 아버지는 새벽 두시, 수레에 말을 매고

아들을 파리 행 기차가 떠나는 생팅래르역으로 데려다 주었다.

 

도리_1~1.JPG

<김도리 신부>

 

1864613일 마침내 도리 신부는 조선 파견을 명받고 말했다.

조선 만세! 내게 이렇게도 아름다운 전교지방을 주신 것을 천주님께 감사합니다.”

 

그는 1864715일 파리를 출발, 마르세유에서 배를 타고 이태리의 시칠리아로 떠났다.

브르트니에르, 볼리외, 위앵 신부들과 함께였다. 배를 갈아타고 이집트의 알렉산드리아,

기차로 스에즈, 다시 배편으로 싱가폴, 홍콩, 상하이를 거쳐 요동에 도착,

186551일 요동에서 배를 얻어 타고 27일 삽교천 부근 내포로 잠입했다.

거기에서 용인 미리내에 가서 먼저 와 있던 오매트르 신부를 만나고,

68일 서울을 경유 623일 용인 손골에 정착했다.

 

 

손골 성지-002.jpg

<손골 성지>

 

 

 

손골은 경기도 수원시의 동북쪽과 용인시의 서쪽에 걸쳐 있는

광교산(582m) 동쪽 깊은 골짜기 안에 있다. (용인시 수지구 동천동)

향기로운 풀이 많고 난초가 무성하여 향기로운 골짜기라는 뜻의

손곡(蓀谷)에서 이름이 유래하였다.’ 향토문화대전등이

어려운 한자를 써서 설명하였으나, 개인적으로는,

황해도 장연군 등 전국 여러 곳의 손골에 대한 지명 유래

손처럼 생긴 골짜기라는 설(조선향토대백과)에 더 수긍이 간다.

 

도리 신부의 편지에 의하면, 당시 손골에는 12가구의 교우들만 살았다.

담배 농사를 주로 하였고, 약간의 논이 있었으나 홍수로 다 떠내려가서

어려운 생활을 하고 있었다.

1857~18665명의 선교사가 손골에서 조선의 생활과 언어에

적응 기간을 가졌으며, 다른 곳의 신부들이 피정을 오기도 했다.

 

18667월 신부의 부모는, 18651016일에 아들이 보낸 편지를 받았다.

그것이 마지막 편지였다.

아들 신부는 이미 186637일 군문효수형으로 새남터에서 참수되었던 것이다.

 

 

도리 신부의 고향 생 틸래르 드 딸몽 성당에서 1955~1966 사목한

조셉 그럴레(Joseph Grelet) 신부는 순교자들에 대한 관심이 많았다.

그는 병인순교 100주년인 1966년 이전에 순교자들을 시복해 달라고

교황청, 주불 교황대사, 주한 교황대사, 프랑스 주교회, 한국 주교회에 청원했다.

그럴레 신부는 1963년 한국에 와서 손골을 찾았고

1964조선 순교자들의 땅이라는 책을 저술하였다.

 

  도리 신부 생가 벽에 붙어있는 십자가.jpg

<생가 벽에 붙어있는 맷돌 십자가>

 

 

그럴레 신부는 도리의 부친이 사용하던 화강암 맷돌을 잘라

똑같은 두 개의 십자가를 만들었다.

한 개는 196638일 도리 신부 순교 기념일에 생가 벽에 모셔졌다.

(실제 순교일은 37일인데 고향에서는 8일로 잘 못 알았다.)

 

다른 십자가 하나는 한국에 보내졌다.

당시 손골 공소 담당인 수원 북수원 본당 류봉구 아우구스티노 주임 신부는

화강암으로 현양비를 만들어 19661024일 그 꼭대기에 그 십자가를 올려놓았다.

그 뒤 현양비는 여러 차례 모양을 바꾸었으나

십자가와 김베드루신부 순교 기념이라고 쓰인 머릿돌은 그 자리를 지키고 있다.

(삐에르 앙리 도리(Pierre-Henri Dorie) 신부의 뻬에르가 베드로의 프랑스식 표기이므로

 신부는 김 베드루’ ‘김도리로 불렸다.)

 

성 김도리신부 현양비-05.jpg

<현양비-꼭대기에 맷돌 십자가>


도리 신부는 1968년 교황 바오로 6세에 의해 시복되었고,

1984년 교황 요한 바오로 2세에 의해 시성되었다.

도리 신부의 유해는 20년간 왜고개성지(용산구 한강대로4046)에 묻혀 있다가

절두산 순교기념관에 옮겨져 안치되었다.

 

파티마 성모 프란치스코 수녀회를 창립한 이우철 신부는

잠원동에 고아들을 위한 성심원을 설립하였고, 이를 수지 동천동으로 옮겼는데,

후원자들에게 부근에 있는 손골의 역사를 설명하고, 순례를 권장하였다.

이들은 1989년 성지개발위원회를 구성하고, 1991년 경당 설립, 현양비 건립을 완공하였다.

20165, 성지 설립 50주년 기념으로 새 성당 준공과 함께

십자가의 길과 순교자의 길, 성인 동상 등이 설치되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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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손골의 도리 신부>

 

 

<참고 문헌 : 손골 성지 홈 페이지. 네이버 지식백과. 두산백과. 위키백과 등>